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제 9장 서유견문에서 압축근대까지 -한국의 근대경험

제 9장 서유견문에서 압축근대까지 -한국의 근대경험
제 9장 서유견문에서 압축근대까지 -한국의 근대경험.hwp


목차
1. 서세동점과 한국의 대응
2. 서양인이 본 조선사회
3. 천주당에서 서양 신부를 만나다
4. 서유견문 (서구를 유람하고 보고 들었다)



본문

제 9장 서유견문에서 압축근대까지 : 한국의 근대경험

1. 서세동점과 한국의 대응
(1) 험난한 개화, 자강운동의 길
조선의 근대화 운동은 중국의 대조선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조선은 중국의 총리각국사무이문을 본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에 각각 영선사와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게 된다. 그 후 조선은 중체서용을 기초로 하여 중국의 양무운동(서양의 기술만 수용)과 일본의 문명개화운동(적극적인 서구화)의 장점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주의적 정책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조선은 개화정책을 추진한 기반을 마련하고 기술을 수용하기 위하여 유학생을 파견하고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그 후 어윤중을 문의관으로 임명하여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호혜평등에 입각하여 재정립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의 거부로 양국관의 실질적 종속관계를 명문화하는 불평등한 통상조약 체결로 끝맺는다.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에 대한 이상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한 중국의 침략정책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본문내용
조선은 중국의 총리각국사무이문을 본떠 통리기무아문 청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1880년(고종 17) 설치한 기관으로 그 밑에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 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에 각각 영선사와 조사시찰단 영선사 : 조선 말기 개화기에 중국의 선진 문물(무기 제조법)을 견학하기 위해 젊은 유학생들을 거느리고 건너가 청나라의 무기제조법 등을 배워오고, 미국과의 수교문제에 관하여 사전 조율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사신(1881~1882).
조사시찰단 : 조사 시찰단은 1881년(고종 18년) 김홍집의 주장에 따라 수신사에 이어 일본 제국에 파견되었던 집단이다. 과거에는 신사 유람단이라고 지칭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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