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인로의 생애 2. 이인로의 문학관에 대하여 - 용사론에 대해서 (이규보의 신의론과 비교하여) 3. 이인로의 작품 분석 - 용사론이 드러난 한시 작품 분석 4. 이인로와 그의 용사론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본문
Ⅰ. 서 론
작시론에서 이인로는 시는 언어의 의미가 제대로 갖추어진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시라는 것은 언어의 구조물 내지는 예술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인로가 옛 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그 표현을 끌어서 쓰는 “용사”를 사용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러한 문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한시에서 용사가 어떻게 사용되며 어떤 작품에 사용되었는지, 또 용사가 사용된 그의 작품들이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를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이인로의 생애
이인로에 대한 고려사 열전의 기록에선 먼저 이인로의 출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인로의 가계는 경원이씨(慶源李氏)로 고려 전기 3대 가문으로 손꼽히던 문벌귀족의 대표적 집안이다. 이는 흔히 그를 문신귀족의 후예로서 그 문풍을 계승하였으며, 복고주의적 성향에 젖어 있었다는 전기(傳記)적인 근거가 된다. 다음으로는 이인로가 정중부의 난 당시에 승려가 되었다가 그 이후에 환속하였다는 기록이다.『파한집』 발문에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이인로가 숙부인 승려 요일(寥一)이 양육했다는 기록이 있어 유년 시절은 사찰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며, 이것은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이인로의 사상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제 살펴볼 것은 오세재, 임춘 등 다른 여섯과 더불어 시와 술로 즐겼다는 기록이다. 이 일곱 사람의 모임을 죽림고회(竹林高會)라 부른다. 위에 실린 고려사의 기록처럼 중국 진(晋)나라 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교하여 해좌칠현(海左七賢) 등으로 일컬었다. 죽림고회의 문인들은 자발적으로 자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기보다는, 중앙의 정치권력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강호에 머물면서 대신 문명(文名)을 떨치려 했던, 즉 내적으로는 세상에 나아갈 것을 희망하면서도 실제 신분은 강호인의 위치에 머물렀던 사람들로 보여 진다.
본문내용 보의 신의론과 비교하여) 3. 이인로의 작품 분석 - 용사론이 드러난 한시 작품 분석 4. 이인로와 그의 용사론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의 Ⅲ. 결 론 Ⅰ. 서 론 작시론에서 이인로는 시는 언어의 의미가 제대로 갖추어진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시라는 것은 언어의 구조물 내지는 예술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인로가 옛 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그 표현을 끌어서 쓰는 “용사”를 사용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러한 문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한시에서 용사가 어떻게 사용되며 어떤 작품에 사용되었는지, 또 용사가 사용된 그의 작품들이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를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 론 1. 이인로의 생애 이인로에 대한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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